검색결과
-
고려 충절신 충혼 달랜 한글 악장(樂章) 발굴제47회 정선아리랑제가 15일부터 3년 만에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다.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정선공설운동장에서 대규모로 진행된다. 축제는 남면 거칠현동 七賢祠(칠현사)에서 고유제를 지내면서 시작된다. 정선출신 고려유신 전오륜을 비롯한 신안·김충한·이수생·변귀수·김위·고천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들이 율창(律唱) 한 7편의 시가 정선 지역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정선아리랑 대표사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와 같은 우국 사설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이런 연유로 정선아리랑 시원설과 7인의 인물과 7편의 시가 언급된다. 이런 연유로 정선아리랑제는 이들의 위패를 배향한 정선 남면 거칠현동 ‘7현사’에서 제를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금년 행사에는 특별한 수서가 들어갔다. 고려 충렬신들을 기리는 ‘악장’ 일편이 낭송되기 때문이다. 이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인 1936년 간행 景賢祠誌(경현사지) 제5권에 수록된 것을 이번에 발굴, 처음 사용하게 된 것이다. 악장은 조선시대 들어 궁중에서 국가행사나 잔치 등에서 행해진 장르이다. 이 번 발굴 작품은 기존의 한문 또는 현토(懸吐) 형이 아닌 국문 중심의 악장이면서 민간에서 행해진 작품이란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를 계기로 발굴 악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고려 충절신은 이른 바 ‘杜門洞72현’으로 통칭된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이성계에 불복하여 두문동 만수산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문신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의 존재와 충절 정신이 세상에 드러나기로는 조선조 후기에 와서다. 1740년 영조 임금이 개성을 행차할 때 만수산 인근 두문동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주게 되고, 이을 계기로 자손들이 가승(家乘)에 수록하자 다시 정조 임금이 감탄하여 1783년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추모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후 ‘두문동72賢’, ‘3隱’, ‘9貞忠’, ‘7賢’ 등의 인물 규정이 생기고, 기리는 문중의 사당 건립과 실기(實記)나 문집 등의 간행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기록이 1809년 ‘두문동선생실기’(3권1책 목판본), 1860년 ‘화해사전’(1931년 재간), 1866년 ‘채미헌실기’(서산서원 발행), 1904년 ‘전씨관면록’9전사자본), 1934년 ‘두문동서원지, 1936년 '경현사지'(목활자본), 1956年 '전씨관면록'(鉛活字本) 등이다. 이 중에 ‘채미헌실기’와 ‘전씨관면록’은 전오륜 등 ‘정선7현’ 관련 시편이 수록되어 주목되고, ‘경현사지’는 고려 충절신을 기리는 한글 악장(樂章)이 수록되어 주목된다. 전자는 정선아리랑의 시원설과 관련 있는 시편이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후자는 민간의 한글 악장이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문헌들이다. 그런데 후자 즉, ‘경현사지’에 수록된 악장 작품은 기존에 국가 행사에서 불러진 악장과는 다르게 민간 향사에서, 그것도 한글로 지어진 악장이란 점에서 큰 가치로 평가한다. 특히 실제 불려진 작품이란 점에서 음악적 논의도 필요한 작품이다. 樂章 享祀 時 擧用 麗季忠賢貞忠大節 죽어죽어 一百番 다시죽어 白骨이 塵土되고 魂魄이 잇든지엄든지 人君ᄉᆡᆼ각ᄒᆞ난 一片丹心이야 엇지끈칠쇼냐 天命이 도라가이 國事가 이미 글넛도다 王氏의 鬼神이 차라리 될지언정 李氏의 臣下난 되지 안컨네 杜門ᄒᆞ기을 甘心하여 죽은 뒤에 말지로다 深山에 드러가면 耕者를 누가 알고 陶河世上머럿시니 슬푸고 슬푸도다 潘溪水에 끄든낙수 周文王을 낙는 ᄯᅳᆺ은 무삼일고 伯夷ᄂᆞᆫ 엇드한 사람이며 나은 엇더한 사람이뇨 齊王蠋의 忠臣不事二君 말은 나도 敬服하난바라 松嶽山을 도라보니 우리 故國이 아니요 首陽山을 바ᄅᆡ보니 차마 한마음을 이질쇼냐 五柳先生淵明은 千古에 同志로다 新朝에 北面마소 二心人이 붓그럽게 高麗山이 어ᄃᆡ잇나 차자가기 願이로다 田橫島가 어ᄃᆡ잇나 차질길이 茫然하다 國破君亡아엿시니 나난어ᄃᆡ로 갈고 時代가 이미 글너시니 안이가고 무어설 求할소야 정몽주의 ‘丹心歌’를 수구(首句)로 충절을 주제로 했음을 제시하고 ‘충신불사이군’ 등의 술어로 출절의 고고함을 찬하였다. ‘新朝’, ‘高麗山’, ‘國破君亡’ 등으로 왕조의 개변이 있었음을 분명이 하고, 충절신들을 천고의 동지로 삼아 살지어라고 한탄하였다. 새로운 우국 악장인 것이다. 악장 전공인 숭실대 조규익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작품을 듣고, "조선시대 ‘용비어천가’로 상징되는 왕조 악장의 전통에서는 그 반대의 고려조 충신을 기리는 내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조 교수는 "享祀時 擧行”이란 기록으로 실제 사용된 사실에 대해 음악 부분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하였다. " 그 곡조가 고려시대 또는 조선 초 민간음악과 관련을 갖고 있다면 메나리조의 중심인 정선아리랑과도 관련지어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국가에서 사용하기 위한 악장이나 현토(한문에 토만 단 형태)악장과 다르게 한글 악장이다. 특히 "享祀 時 擧用”이란 표기와 홀기(笏記)이어 수록한 것으로 볼 때 1783년 개성 성균관 표절사(表節祠) 제향이나 1936년 경현사 제향에서 실제 불린 것으로 볼 수 있다. 15일 제47회 정선아리랑제에 맞춰 ‘7현사’에서 축제 고유제가 있다고 한다. 이 뜻깊은 행사에 충절신 향사 전통을 이어, 이 번에 곡조를 얹어 부르지는 못 하더라도 낭송으로라도 올린다면 의미가 클 것으로 보인다. 일곱 충신들의 위패 앞에서 제를 지내는 것은 충절 정신을 계승하고, 정선아리랑을 가시화 한 역사성을 기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
(38) <br> ‘2005’의 아리랑<12><br>정선의 아라리 기층(2)정선의 아라리 기층을 논의하는 지난 회에서는 정선과 그 이웃 지역이 동일한 자연적 조건이었음을 전제했다. 즉, 오늘의 전형성이 형성되기까지는 ‘아리 시대’, ‘아라리 시대’, ‘아리랑 시대’를 거쳐 왔고, 메나리토리 노래가 형성되어 확산될 여건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 계곡이라는 공통 조건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메나리토리 노래의 출처를 특정할 수 없음으로 ‘발생(상)지’라는 용어 보다는 ‘전승 중심지’와 ‘전승 주변지’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기층성의 특수성을 파악하여 중심지를 추정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른다면 정선지역이 ‘전승 중심지’이고 영원 평창 태백 강릉 지역이 ‘전승 주변지역’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선지역이 전승 중심지라고 추정한 근거인 ‘기층성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회에서는 이를 논의하기로 한다.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의 전형성(典型性) 형성은 정선지역에서 ‘정선아리랑’이란 종목명을 일반화 한 시기인 1970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정선인들이 선율과 사설의 다양성과 평등성을 반영한 기록물 출판활동 및 제도적 전승책을 마련한 시기가 이 때이기 때문이다. 기록물은 1968년 사설집 「旌善아리랑」 발행, 1972년 음반(신진레코드사)발매, 1978년 군지(郡誌)를 발행하고, 1976년 ‘정선아리랑제’를 개최하여 확산시켰다. 또한 주산 비봉산 중턱에 <정선아리랑비(碑)>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제도적 전승체계를 확립하는데, 1971년 ‘정선아리랑’이란 종목명으로 도지정 문화재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였다. 이런 기록과 전승 실천에서는 역사성을 반영했고, 전형성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확인되는 정선아리랑의 전형성은 다음 몇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하나는 음조가 메나리조이다. 둘은 여음구(후렴구)를 먼저 부른다. 셋은 대표사설을 "눈이 올라나~”로 부른다. 일반적으로 독창이다. 마지막은 소리판에서 간헐적으로 엮음아리랑을 이어 부른다. 이는 오늘의 정선아리랑 형태인 것이다. 이런 전형성 확립 현상은 동시대 정선과 다른 주변 지역과는 다른 정황이다. 이는 다른 지역에는 없는 역사성을 기재로 하고 있다. 즉, 고려말 이성계에 의해 역성혁명이 있게 되자 일부 선비들이 출절을 지키기 위해 관직을 버리고 정선 거칠현동으로 들어와 은거하게 되었다. 이들은 시운을 한탄하며 쓰라린 회포를 달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는 정선인들이 불러오던 곡조에 자신들의 신세를 표현한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라는 내용의 노래다. 이를 계기로 널리 불리게 된 것이 오늘의 정선아리랑 역사라는 주장이다. 바로 이런 역사가 서려있기에 정선의 아리랑이란 뜻이 담긴 ‘정선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전승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역사성을 반영한 전설은 다음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시기는 500여년 전 고려말, 관직을 지낸 7인이,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으로 와 은거, 이들이 고려왕조를 회고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가 정선아리랑의 역사(시원)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런 옛 지명인 ‘도원(桃源)’이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정해지고, 다시 현재의 지명 ‘정선(旌善)’이 1353년(고려 공민왕2년) 형성된 시기임으로 고려왕조와는 각별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역사성은 1980년대 초 정선 유지(有志) <전태화 정선의원장 면담조사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한 관련 기사나 2006년 발행된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설 연구」에서 다각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런 논의에서 곡명을 ‘정선아리랑’으로 쓰게 된 기제가 역사성임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제 위에서 제시한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서 처음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전인 이조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왕조를 섬기고 벼슬하던 선비들 중에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집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서하며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에 젖어 고난을 격어야 하는 심정을 읊었다.” 사설집 「旌善아리랑」‘由來’편의 일부이다. 고려왕조의 충절을 지킨 7인이 정선에 은거하여 살며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 "그 때 선비들이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이 지방의 선비들이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지금의 정선아리랑의 가락이다.” 1977년 개최된 제2회 정선아리랑제 행사자료에서 인용한 ‘정선아리랑의 유래’ 중 일부이다. 소위 정선아리랑의 ‘고려유신 한시 율창설’의 진술이기도 하다. # "이(눈이 올라나…) 노래는~ (중략) 송도에는 험악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는 이러한 어려운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 연유에서 불러지게 된 것이다.” 정선아리랑비 후면 기록의 일부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구름이 다 몰려온다”를 정선아리랑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사설이라고 하였다. 은거 7인 중 채미헌 전오륜(採薇軒 全五倫)은 정선 전씨의 중시조로 1373년(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여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고관이다. 현재 남면 거칠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들이 개성에 있는 고려의 진산 만수산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시국의 암울함을 한탄할만하다. 곧 고려왕조 500년의 멸망을 노래한 것이라는 전설의 서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역사성은 전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정선인들은 물론 인근 지역인들도 수긍할만한 것으로서 아리랑의 시원이 정선에 있음을 공감하게 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적어도 조선왕조말 1809년 「杜門洞實記」를 발행하여 이들을 충절 인물로 재평가하면서 부터라고 본다. 이상을 감안하여 정리한다면 정선아리랑의 전형성이 구축되는 시기는 경복궁 중수 이후 외지에서 들어 온 여음구가 정선아리랑의 후렴으로 함께 불리는 시기인 것이다.
-
정선아리랑 창극 '거칠현'(去七賢)◈ 공연일시 : 2005. 1. 15(토)~16(일) 15-p.m 4:00, 7:00 / 16-p.m 4:00 ◈ 공연장소 : 노원문화예술회관(02-3392-5721~5 www.art.nowon.seoul.kr) ◈ 공연문의 : 02)745-2124(문화기획파란) ◈ 주 관 : 극단무연시, 정선아리랑창극단 ◈ 주 최 : 정선군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현존하는 아리랑 중 본조가 되는 정선아리랑의 보존과 전승 그리고 발전을 도모하고자 2004~2005년을 맞이하여 더욱 새롭고 다양한 시도로 정선아리랑창극-‘거칠현’을 제작, 공연한다. “살아 숨쉬는 우리 아리랑의 뿌리, 정선아리랑의 역사적 시원을 통해 그 참된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 작품 배경 ] 정선아리랑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인 조선 초에 고려왕조를 섬기던 충신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을 다짐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현재의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먹으며 생활하면서 충절과 지난날의 회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당시에 전해지던 아리랑 곡조에 한시를 지어 율창한 것에서 그 역사적 시원을 찾는다. 거칠현동칠현은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沖漢), 고천우(高天禑), 이수생(李遂生), 신 안(申 晏), 변귀수(邊貴壽), 김 위(金 瑋)를 일컫는다. 정선아리랑창극-‘거칠현’은 아리랑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작품이다. [ 작품 줄거리 ] 평화로운 정선에도 고려가 멸하고 조선이 개국되는 와중에 혁명의 물결이 밀려온다. 위화도에 출전했던 랑이가 정신을 잃고 돌아와 아리의 보살핌 속에서 지내는 중에 송도 두문동 광덕산에 은거하던 고려의 충신들 중 이성계 일당의 만행을 피해 전오륜을 위시한 충신 일곱명이 정선 거칠현동 백이산 소도로 피신해 온다. 뒤를 쫓아 온 조선군사들이 산 아래를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삼척으로 유배를 당한 고려의 마지막 황제인 공양왕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전해온다. 삼척의 공양왕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며 황제의 복벽을 추진하던 칠현들은 울진 등지에서 뜻을 같이하는 군사들이 동참함에 힘을 얻는다. 이를 예의주시하던 최부자와 이별장은 복벽의 근원을 차단하고자 대종을 이용해 공양왕의 시해를 은밀히 사주한다. 한편 마을사람들과 의기투합한 칠현들은 정선사람들을 통해 아리랑의 진정한 의미와 자연을 그대로 닮은 소리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며 자신들의 처지를 아리랑 곡조에 실어 기록으로 남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복벽을 위해 공양왕이 도착하던 날 칠현들과 정선인들에게 황제의 시해 소식이 전해지고 아리와 랑이는 칠현들을 대신해 이별장과 조선의 군사들에게 처절한 죽음을 당해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게 되고 칠현들과 마을사람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자신들의 갈등과 한을 위로한다. 아리랑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산을 울리고 하늘을 울리며 살아있는 모든 자에게 다가온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제1회 '김법국국악상' 후보 3인, 심사
- 2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
- 3‘2024 광무대 전통상설공연’
- 4국립남도국악원, 불교 의례의 극치 '영산재', 특별공연
- 5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
- 6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에 이소영씨
- 7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
- 8서울문화재단,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서울스테이지 2024' 5월 공연
- 9이무성 화백의 춤새(91)<br> 춤꾼 한지윤의 '전통굿거리춤' 춤사위
- 10제3회 대구풍물큰잔치 ,19일 디아크문화관광장